학생독립운동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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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어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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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은 작게는 광주전남 지역의 학생들이 일제의 폭압에 항거한 작은 사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전 개되어 갔습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의는 바로 시작이라는 점입니다.

1920년대 초부터 서서히 시작된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발생한 조선 여학생 희롱사건이 불씨가 되어 11월 3일의 항일 시위가 시작하게 되 었습니다. 그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으며, 학생 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국민들이 일제히 일본의 폭력에 대항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숭고한 정신이 깨어나게 된 것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주에서 시작된 작은 물방울 하나가 전국으로 확산되어지고, 나아가서 중국과 일본내에서도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불의에 대항하고, 민족적 자긍심으로 일깨운 작은 물방울 하나가 큰 파도가 된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한제국 국망일지
년도 내용
1897년 고종 대한제국 선포
1904년 러.일전쟁 중 한일의정서 체결로 일제의 내정간섭 본격화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 빼앗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 강제 퇴위 후 순종 즉위 정미 7조약으로 행정.사법권 빼앗기고 군대 해산됨 군대해산으로 의병전쟁 본격화
1910년 국권을 빼앗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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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은 조선경제구조를 수탈에 적합하게 재편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농업부문에서 단행된 '토지조사사업'으로 일제는 이를 통해 한말 이래 불법으로 침탈해 온 일본인의 토지소유를 법적으로 인정해 주었고, 농토의 약 40%를 포함한 광대한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함으로써 일본자본의 토지 침탈을 촉진했다.
또한 임야 조사사업 등을 단행하여 전 임야의 60%를 국유림으로 편입했으며, 농업정책 부문에서도 값싼 조선 쌀과 공업원료를 수탈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 외에도 금융을 통제하고 허가제인 회사령을 실시함으로써 민족기업의 성장을 억압했다. 이로써 민족자본가들은 큰 타격을 받아 영세적인 기업 경영에만 머물렀으며,농민은 조상 전래의 토지를 빼앗기고 빈농.소작농으로 전락하고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 등지로 이주하는 등 절박한 상황에 내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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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교육정책의 목표는 우리 민족을 영원히 말살하고 일본의 하등 국민으로 만들려는 데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인에게 고등교육은 되도록 회피시키고 초보적 지식과 일본어 습득 위주의 교육만 받게 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에 눈뜨지 못하도록 했으며 기능.기술을 숙련시키는 실업 및 기술 교육을 장려하여 최소한의 지식과 기술만을 갖추도록 조장했다.
그러나 사립학교.종교 계통의 학교.개량 서당.강습소.야학 등이 소수이지만 민족의식 앙양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많은 애국지사들이 우리 민족 문화를 수호하려고 노력했으며, 특히 국어와 국사 연구 및 이에 대한 교육은 민족 전통의 자각과 민족주체 의식을 일깨우는 입장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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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조선교육령 초안본(1911. 7. 12)

이 교육령은 직업 교육에 중점을 두었고 사범교육 항목이 삭제되어 있어 일제가 한국인을 단순한 식민지 노예로 전락시키려 했던 저의를 실증해 주고 있다.

한일학생의 취학률(1925)

한국인은 일본인과 비교하여 교육기회에 심한 차별을 받았으며 그 차별은 전문학교, 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으로 갈수록 더욱 심화되었다.

보통학교 국사 교과서(1932)

'황국사관'을 바탕으로 서술된 일제 강점기의 역사 교과서로 일본 역사를 중심으로 일본과 한국의 역사를 서술했다.

보통학교 지리 교과서(1934)

일제 강점기의 지리 교과서로 한국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규정했다.

제복입은 교사에 의한 황국신민교육광경

일제는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켜 충성스럽고 선량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만들고자 했다.

일본어 사용을 강요한 포스터

일제는 우리 말과 글을 금지시키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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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의 자존은 일제의 총칼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으나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독립운동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일제의 탄압 때문에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편성하여 일본군과 잦은 전투를 벌였으며, 국내에 남아 있던 애국인사들은 국외의 세력과 연결하거나 독자적인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을 그치지 않았다. 농민.노동자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쟁의.파업을 일으키는 등 적극적으로 일제에 맞서 싸웠다.

2.8 독립선언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재일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발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3.1운동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온 겨레가 불길처럼 일어나 항일투쟁을 벌임으로써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천명했다. 3.1운동은 국내적으로 일제의 폭압적 무단정치를 변화시켰고, 국외적으로 중국.인도 등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6.10만세운동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장례식 날 서울 종로 일대에 일제히 격문이 뿌려지고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거사는 학생과 사회주의계열에 의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것으로 곧 전국적.전민중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했다.

근정전에 내걸린 일장기

1910년 8월 9일, 제국주의 일본은 한일합방조약을 공포한 후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를 걸어놓고 국권침탈을 상징화했다.

고종.순종과 총독부 간부들 (국권침탈직후)

중앙이 고종, 그 오른쪽이 순종. 고종 왼쪽은 영친왕, 그 옆이 데라우찌 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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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 이후 1927년 2월 비타협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이 함께 참여하는 국내 최초의 민족당일당인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신간회는 급속히 세력을 뻗쳐 나가 1929년 초에는 지회가 144개, 회원은 3만 9천여 명에 달했다. 한편 1927년 5월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가 창립되었으며 64개의 지회가 설치되어 각 지역의 여성운동을 지도했다. 신간회는 합법적인 지역별 순회경연을 개최하여 대중들에게 식민지 지배의 본질을 고발하고 민족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으며 각 지역의 노동.농민.청년운동을 지도하고 전국에서 전개되던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지원했다. 또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탄압과 좌우의 분열로 신간회는 1931년 5월 해체되었다.

신간회 창립 보도기사

초대회장에 조선일보사장 이상재가 선출되었다. (조선일보 1927. 2. 17)

신간회 광주지회

신간회 광주지회는 1927년 10월 설립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투쟁을 효율적으로 지도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큰 활약을 했던 장석천.강석원.국채진은 신간회 광주지회 회원이었으며 장석천과 국채진은 간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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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학생층은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지식층이었으며 노동자.농민 등 다른 사회계층보다 조직화되기 쉬웠기 때문에 항상 민족운동의 전면에서 활동했다. 그러므로 일제 강점기 3대 민족운동이었던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모두 학생층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이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학생들은 식민지 차별교육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고 불만을 가졌으며 사회경제적 피폐상을 겪으면서 일제 식민통치의 모순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육 차별과 식민지배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나아가 민족의 해방을 위해 비밀결사인 독서회의 조직, 동맹휴학, 학생단체의 조직과 계몽운동 등을 감행하면서 항일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주가 된 항일맹휴투쟁

1920년대부터 가열되기 시작한 동맹휴학 투쟁은 당시 학생들이 결행했던 항일독립운동의 한 형태였다. 맹휴투쟁은 전국 거의 모든 학교에 보편화되어 있었으며 그 배후에는 언제나 비밀결사가 자리하여 지도했다.
광주지역에서도 1924년부터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등에서 동맹휴학이 활발히 전개되어 조직적으로 항일역량을 키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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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에 나타나는 학생운동에서의 또 다른 변화는 비밀결사의 대두였다. 치안유지법과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학생단체에 대해서도 탄압이 심해지자 학생들은 맹휴투쟁을 전개해 나가는 동시에 보다 적극적이고 장기적인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해 나갔다. 학생비밀결사는 전국적으로 두 가지 형태로 조직되었는데 하나는 각 학교 단위로 결성된 독서회였으며, 다른 하나는 독서회를 기반으로 지역 단위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비밀결사를 비롯한 학생단체가 서울 중심에서 벗어나 학교나 지역 단위로 조직되기 시작한 것은 활발해진 맹휴투쟁과도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었다. 주로 학교 단위로 맹휴를 전개해야 하는 현실적 필요성에서 전국적인 조직보다는 학교나 지역 단위의 결속이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중반기 대표적인 학생운동
년도 내용
공개조직 - 조선사회과학연구회(서울)
비공개조직 - 학생야체이카(서울)
- 조선학생혁명당(서울, 1927. 3 결성)
- 조선학생전위동맹(서울, 1927. 10 개칭)
- 신우동맹(대구, 1927. 11 결성/1929 하반기 해체)
- 성진회(광주, 1926. 11 결성)

이 중 광주 지역의 비밀결사인 성진회와 독서회 중앙부는 광주 지역의 학생운동을 주도했으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진회

성진회는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결사다.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왕재일과 장재성, 광주농업학교 학생인 박인생 등은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고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조직체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성진회를 결성했다.
회원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비밀히 단결할 것을 결의했으며,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독립을 이루기 위한 실천 방법을 상의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성진회는 활동한 지 5개월 만인 1927년 3월 하순 비밀이 누설 될 염려가 있어 표면상 해체했고 그 뒤에도 연합집회는 하지 않았지만 각 학교 단위로 활동하는 형식으로 모임을 계속했다.

소녀회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독서회로서 일찍이 1928년 11월 초순에 결성된 단체다. 회원들은 광주사범학교 뒷산에 모여 소녀회를 조직하고, 매월 한 번씩 모여 사회과학을 연구하기로 결의했다. 회원은 장재성의 누이인 장매성을 비롯하여 박옥련, 고순례, 장경례, 암성금자, 남협협, 박계남, 박채희, 박현숙, 김금연, 김귀선 등이었다.

독서회

1929년 6월 중순 동경 중앙대학 예과에 유학했던 장재성이 학업을 중단하고 광주에 돌아와 광주고보, 광주사범, 광주농교의 학생들과 양림리에 있는 김기권의 집에 모여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했다. 이어 각 학교별로 독서회가 조직되어 민족문화와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민족의식을 드높이는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독서회는 학생들을 통솔하고 지도하는 조직으로 발전해갔으며, 이는 결국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굳건한 바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