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사이트맵

독립운동 그 이후

  • 학생독립운동이란
  • > 독립운동 그 이후

독립운동 그 이후

1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계승

광주학생독립운동은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전체 항일민족운동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29년 2월경만 하더라도 운동가들은 당시의 상황을 침체상태에 빠진 '퇴조기'로 파악하고 활동에 상당히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1년 뒤인 1930년 봄에 가면 이러한 상황인식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운동가들이 당시 상황을 '혁명적 시기'로 인식했는데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바로 1929년 10월 시작된 세계대공황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이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세계대공황을 자본주의 사회의 말기적 현상, 자본주의 몰락의 시초로 파악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3.1운동 이후 최대의 사건, 혁명의 불덮개를 처음으로 열어 놓은 역사적 계기로 보았던 것이다.

재판 또는 퇴학을 받은 학생들이 1930년대 민족운동의 주역으로 등장

이 시기 학생비밀결사는 1931년부터 193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결성되는데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을 전후한 반전.반제투쟁과 무관하지 않았다. 각 비밀결사들은 신문을 간행하거나 반전 격문을 살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신문사 주도의 농촌계몽운동에도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재판을 받거나 퇴학을 받은 학생들은 1930년대 초반부터 학생운동과 연관을 갖거나 직접 청년.노동.농민운동에 뛰어들어 민족운동의 각 부문에서 활약했다. 당시 광주.전남지역에서 시위운동을 주동한 인물들도 '전남노동협의회', '전남사회운동협의회' 등에서 활약했다.

제2차 광주학생독립운동(무등회사건)

1940년대에도 학생비밀결사의 활동은 계속되었다.이 시기 학생비밀결사로 비교적 규모가 컸던 것으로는 대구사범학교의 3대 조직인 문예부.연구회.다혁당(茶革黨)과 함흥시내 각 학교의 철혈단(鐵血團), 대구상업학교의 태극단(太極團), 광주서중학교(광주고보의 후신)의 무등회(無等會)등을 들 수 있다.
1938년 광주고보의 주만옥, 강한수, 유몽룡 등은 독서회(1939년 무등회로 개칭)를 조직, 학생층을 대상으로 독립 사상과 항일 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벌여 나갔고, 1943년 5월 21일 학도 지원병 반대, 창씨개명의 반대, 일본어 사용 반대, 징병제의 반대 등을 주장하면서 일제히 동맹휴학에 들어 갔는데 이를 무등회사건 또는 제2차 광주학생독립운동이라고도 한다.

2

독립운동그이후

일제의 노예교육에 항거하고 민족의 독립을 찾고자 투쟁한 광주학생독립운동 참가자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 선구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제의 탄압을 받 아 혹독한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운동에 참가한 주역들 중에는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감옥 에서 옥사하거나 병을 얻어 출옥 후 곧 사망한 분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출옥 후에도 일제 경찰의 엄중한 감시와 차별을 받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는데 이는 당사자 뿐만 아니라 친인척들에게도 확대 적용되어 일가족이 함께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던 11월 3일은 '학생의 날'로 제정되어 기념되고 있었다. '학생의 날'은 일제시기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학생들에게 자율역량과 애국심을 함양시키려는 목적에서 1953년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1973년 학생들이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을 벌이자 기념일에서 폐지되었다가 1984년에 다시 부활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후 2006년 2월 9일 다시 국회에서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 변경하기 위한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학생의 날 제정 경위
년도 월일 내용
1953 10. 20 제16차 임시국회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인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하는 결의안을 의결
1953 10. 30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
1973 3. 30 '학생의 날' 폐지 정부는 대통령령인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하여 53개 기념일을 26개로 줄이면서 '학생의 날'을 기념일에서 제외시켰다. 정부는 각종 기념일을 통폐합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나, 이는 당시 유신체제에서 학생시위 사태를 의식한 조처라는 게 중론이었다.
1973 10. 31 제9대 국회 제88회 내무위원회에서 '학생의 날' 제정에 관한 건의안을 제안
1982 9. 14 민한당에서 '학생의 날' 제정에 관한 건의안을 국회에 제출
1984 7. 10 제11대 국회에서 '학생의 날' 제정 건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
1984 9. 19 '학생의 날' 법정 기념일로 부활
2006 2. 9 제17대 국회 "학생의 날"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 변경하기 위한 결의안 채택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에 대하여

일제시대에 항일독립운동을 하고서도 해방 후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애국지사들이 적지 않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 중에서 장재성, 강해석, 이기홍, 이영백, 이영범, 이용근 등도 해방 후의 사회주의 활동이 문제가 되어 아직까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실정을 안타깝게 여기고 독립운동에 기여한 인물이라면 이념에 관계없이 독립유공자로 포상해야 하며 해방 전 항일운동 공적만을 대상으로 역사적 평가를 내려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이에 호응하여 정부에서는 사회주의 활동 때문에 건국공로 포상이 보류 내지 취소된 좌파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2005년부터 새로운 심사기준을 마련하고 재평가 작업을 하여 건국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면 포상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항일독립운동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도 해방 이후 분단이라는 상황에서 좌우 대립 속에 묻혀 버린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이 세상에 드러나 밝혀질 날이 멀지 않았다.